반추(反芻) - 12 -
절망...
광주에서 나온지 한달쯤 후, 여전히 날 보면 낯을 가리는 딸 아이를 안고 아내와 함께 무작정 처갓집으로 향했다. 이젠 뭐든지 부딪혀서 해결하는 수 밖엔 없다란 생각이 든 것이다. 처갓집 식구들은 난리가 났다. 장모님과 처제는 아내를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하시고, 장인 어른은 베란다에서 담배만 피우시고... 처남은 내 멱살을 부여잡고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아내는 내가 징역을 사는 동안에도 단 한번도 친정과 연락을 취하지않고 딸아이와 단둘이서만 버텨왔던 것이다. 난 무조건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펄펄 뛰시는 장모님을 만류하시며 장인께선 "사람은 누구나 귀천이 없다. 하지만 딸 가진 부모로서 아무런 대책도 없이 선뜻 딸을 줄수는 없다"며 나의 가정 환경등을 물어보셨다. 그러나 난 드릴 말씀이 없었다.
태어나서 내 자신이, 내가 살아온 환경이 그렇게까지 부끄러웠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 자리에서 난 모든 걸 추호도 남김없이 다 고백 드렸다. 태어나 자란 환경과, 몸뚱아리 하나로 악귀처럼 살아 온 내 삶...그리고 전.과 사실까지도...하나도 숨김없이... "이놈아! 이 날강도 같은 놈, 천하에 도둑놈아! 너같은 놈이 어떻게 내 딸을 꼬여서...엉,엉" 뺨으로, 뒷통수로 장모님의 손바닥이 마구 날아와 입술이 터지고, 코피가 흘러 카펫을 적셨다. 너무도 기가 막혔는지 아무도 장모님을 말리지 못했다. 나도 피하지 않았다.
불에 댄듯 울어대는 딸의 울음소리에 돌아보니 딸아이가 날 쳐다보면서 딸아이가 악을 쓰며 울고 있었다. 가슴이 미어터지는 것만 같았다. 담배를 한 대 다 태도록 아무 말씀이 없으시던 장인께서 무거운 어조로 말을 꺼내셨다. "아이랑 현주는 당분간 잊어보려고 노력해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 미처 뭐라 말을 꺼내기도전에 고래고래 고함을 치시며 장모님의 말씀이 이어졌다. "뭐가 당분간이에요? 난 내딸 저 놈한테 죽어도 못줘여,아니 안줘!!!" 사람이 너무 절망스러워지면 추워지나보다. 난 정말로 부들부들 떨다가 조용히 그 자리에서 일어나 장인어른께 큰절을 올렸다.
"그동안 정말 잘못했습니다." 응접실 구석에서 처제를 껴안고 겁에 질려 울기만하던 아내가 달려와 날 부여안고 같이 가자며 매달리고 애원을 했지만...난 "담배 한대만 피고 올거야, 너 오빠 믿지?" 아내를 달래려고 노력했다.
거짓말 말라며 울며매달리는 아내를 떼어놓았다. "바보야 오빠가 너한테 거짓말 하는 거 봤니? 내가 너랑 우리 선희를 두고 어딜가? 자! 못믿겠으면 차키랑 지갑이랑 다 맡기고 나갔다 올께" 처남이 아내를 떼어냈다. 울부짖는 아내를 뒤로한 채 현관문을 나오자마자 약속을 지키려는 듯 정말로 그자리에서 난 담배 한대를 입에 물어 불을 붙였다.
회한처럼 뿜어져 나오는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절망스러워 난 또한번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다. 터덜터덜 성북구에서 구로동까지 걸어 집으로 돌아오니 어느덧 뉘엿뉘엿 해가 저물고 있었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가 눈을 뜨니 새벽 2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다시 한번 이를 악물었다.
"그래 씨발! 돈을 벌자! 누가 뭐래도 제대로 한번 돈 벌어서 내 아내와 내 딸아이를 찾아 오자!" 대충 남은 걸 정리하니 구로동의 30평짜리 오피.스텔 전세 한채와 차 한 대가 달랑 남아 있었다. 일단 오피.스텔을 월세로 돌리고 나니 손에 쥐어진 건 전세금 3천... 그거면 충분하다 생각했다. 3년여전의 난 맨몸으로도 일어나지 않았던가!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이 다짐했다.
건달사업에의 미련따윈 이미 교도소안에서 지웠지만... 그길에서의 경력을 최대한 활용하는 길밖엔 달리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하우스를 개장하기로 했다. 단시간내에 몫돈을 버는덴 내가 아는 한도내에선 그길이 최선 이라 생각했기에...
하지만 내가 징역을 사는 2년동안 밖은 또 달라져 있었다. 이미 난 동네의 골목대장도 아니었고, 업주들 또한 새로운 골목대장의 정치에 길들여져 있었다. 내가 아는 선수들이 거의 없었다.
오프에선 4포 5포가 용납되질 않는다. 제대로 6포 선수들을 맞춰주지 못하면 예약된 게임은 판이 깨지기 일쑤였고, 알음알음 소개로 선수들을 소개받으면 어김없이 통비를 맞춰달라고 했다. 선수 두명을 붙여주면 그날 데라의 30%를, 세명을 맞춰주면 50%의 통비를 요구했다. 어이가 없었다. 대가리 굵어지면서 슈킹으로 잔뼈가 굵은 내게 슈킹을 들이대는 꼴이 아닌가!!! ㅎㅎ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말도 있듯이 난 그렇게는 갈수 없었다. 깨지면 내가 깨지는 건데...결국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자기들이 벌겠다는 식의 계산법에 놀아나긴 싫었다. 앞전을 뛰기로 했다. 운이 좋았던지, 당시 워커힐 카지.노에서 딜러를 보던 중학 동창을 소개 받는 계기가 생겼다. 다행히 나도, 녀석도 서로를 기억하고 있었기에 날밤을 새며 함께한 술자리 한번으로 녀석은 아무 조건없이 비번날마다 내게 건너와 포커의 이론과 운영론등에 관해 가르치기 시작했다.
초이스의 패턴과 오픈의 정석, 메이드의 확률과 오구에 무조건 꺽어야 할 패, 육구 카드를 반드시 받아야 할 패... 일천한 경력이지만 내겐 참으로 경이로운 이론들 이었다. 카드의 경륜이 좀 있으신 분들이라면 누구라도 온과 오프사이엔 엄청난 갭이 존재한다는 걸 아실거다. 온라인에서야 어차피 랜덤이라는 운이 따라주면 정말 마바리 사이즈라도 돈을 딸수가 있다. 그건 말 그대로 운이 좋아 이긴 것이다.하지만 오프에서는 결코 운이 존재하질 않는다고 난 믿는다. 실전에서의 포커는 사이즈 싸움이다.
예를 들어 바둑을 두는데 프로 9단의 전문 기사와 아마 7급이 내기 바둑을 둔다고 치자. 서로 현금을 걸고서...그것도 아무런 핸디캡도 주어지지않은채 바둑을 맞둔다면... 어느 누구라도 이해가 안갈 것이다. 그렇지만 그게 이해가 되고 허용이 되는 세계가 바로 포커일 것이라고 난 단언한다.
난 그걸 배우게 됐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조금은 의기양양해진 맘으로 실전에 뛰어들었다. 결과는 참담한 패배의 연속이었다. 실전 경험과 노하우가 없는 이론은 아직은 내겐 무리였던 것이다.
삼천이란 돈은 순식간에 날아갔고, 오피스텔의 월세 보증금 천만원 마져도 몇차례의 하우스 출입으로 봄눈 녹듯 사라져 갔다. 웃긴 것은 그날 내 돈이 누구 수중으로 흘러갔는지도 모를만큼 난 그들에게 좋은 손님이었다는 것이다.
돈이 사라져 간다는 허무보다는 매일 그리움으로 짓물러가는 내 마음의 고통에 더욱 절망스러웠다. 아내와 딸아이가 너무 보고싶었다.
한번 터진 눈물은 봇물과도 같았다. 거의 매일밤을 술에 젖어 펑펑 울며 지새워야 했다.
여관을 운영하던 동네 형의 도움으로 방 하나를 얻어 들어갔다. 그곳에서도 역시 매일 술이 없인 하루하루를 버틸수도 없는 내가 되어가고 있었다.
어느덧 아내와 딸아이를 못본지도 석달을 넘어서고 있었다. 미칠듯 보고싶었지만...먼 발치에서라도 내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찰나만이라도 보고싶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법을 어겨 전과자였던 난... 사회와 국가앞에 엄연한 죄인이었지만, 처갓식구들 앞에선 더더욱 커다란 죄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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